휴관
작가이름
김민정전시명
《TRACES》기간
2015. 11. 05 - 12. 27장소
OCI미술관김민정 개인전 《결》
나무가 시간을 기억하는 방법은, 쏟아졌던 햇살과 빗물을 고스란히 제 몸 안에 새겨 넣는 것이다. 온난한 여름을 거치며 덩치를 크게 키웠던 해에는 널찍하고 무른 살결로, 혹독한 겨울을 보내며 몸을 잔뜩 웅크렸던 때에는 촘촘하고 단단하게, 둥근 나이테를 그려가며 나뭇결을 만든다. 인간은, 세월로 이루어진 나무의 몸을 억척스럽게 벗겨내어 종이를 만든다. 여린 나무를 잘라서 찌고, 삶고, 두드리고, 다시 말려서 쓰임을 찾는다. 그런데 종이에도 나무의 섬유질이 남아서 이룬 결이 생겨난다. 마치 자연이 주었던 기운은 그 형태가 변할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부드럽게 항변이라도 하듯 보다 섬세하고 고운 흔적이 종이에 남겨진다.
김민정은 바로 ‘결’을 다루는 작가이다. 이제는 나무의 것이라고도, 인간의 의지만이라고도 할 수 없는 한지의 결을 가늠하며, 그는 먹 선을 긋고 종이를 불태워서 또 다른 결을 만들어낸다. 한지를 두고 김민정은 이를 만져보았을 때 꼭 자기 살결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또로록 한지를 말아 옆구리에 끼고 온 땅을 누비며 보헤미안의 삶을 살아간다. 고국을 떠난 지 스물네 해가 훌쩍 지났으나, 한 평생 한지를 놓지는 못하였다. 이쯤 되면 김민정이 한지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손과 입이 없는 종이가, 나무가, 혹은 자연이 김민정을 그들의 사자(使者)로 선택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민정의 여러 작업 중에서도 결이 도드라지는 한지 콜라주 작품을 엄선하였다. 조각을 이어 붙였으되 무작정 오려 붙인 종이가 아니다. 향이나 촛불로 태워내어 그렇지 않아도 얇고 가벼운 종이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더 덜어내고, 한지의 켜를 쌓는 작업이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쉽사리 발걸음을 뗄 수 없는데, 이는 언뜻 점이나 선처럼 보이는 테두리가 물감으로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 다가가 보면, 가장자리마다 불에 그을린 자국이 은근한 갈색 음영을 드리우며 존재감을 발산한다. 현란한 형상으로 아우성을 치는 대신 한지의 담담한 물성이 자연스럽게 도드라져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서예를 익히고, 대학과 대학원에서도 한국화를 공부한 김민정이 한지를 ‘태우는’ 작업을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이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와, 현지에 정착한 지 10여 년이 지났을 때다. 사람이 붓으로 짓는 선이 너무 약하다고 느껴지던 찰나, 작가는 이제 사람의 손이 아닌 것에 선을 맡겨 버렸다. 종이와 불이 만나 이루어내는 공동 작업으로서의 태우기는 세속적 삶의 격정과 욕망을 정화하는 한편, 작가의 숨결을 그대로 옮겨 담는다. 김민정은 종이를 태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을 하지 말 것, 그리고 숨을 고를 것이라고 꼽는다. 그렇지 않으면 고른 선이 나올 수 없으므로. 숨만 크게 쉬어도 파르르 떨리는 종잇장을 다루고, 금세 화르르 타버리는 불길을 살피는 일은 눈에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움직이는 공기의 파동을 다스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김민정의 작업은 유연하게 춤을 추는 듯 하다. 홑겹이거나 포개어진 여러 겹의 종이이거나, 마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 단락만을 똑, 떼어온 듯하다. 네모난 화폭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아도 이 일렁거리는 움직임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어디에서 끝날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차라리 거대한 흐름에 몸을 내어 맡기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작품의 내적 리듬이 생겨난다. 이것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비결정적 과정이다. 사람의 손은 삽시간에 왔다가 흩어지는 예술적 영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한 폭의 종이 위에 순간의 직관을 전부 옮겨 담을 수가 없어서 작품의 리듬은 완결되지 않은 채, 그렇게 흘러간다.
사실, 김민정에게는 작업 자체가 하나의 과정이다.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며 종이를 태우고, 풀을 칠하고, 다시 종이를 붙이는 수공(手工)을 반복하면서, 그는 번뇌를 덜어내고 명상으로 침잠한다. 켜켜이 붙여가는 한지의 겹은 작가의 사유가 축적되는 것을 가시화할 뿐이다. 종이의 빈 면에서부터 응축되기 시작한 리듬은 물리적으로 한정된 화폭에 깊이를 더하며, 심상적 공간을 확장한다. 작가에게 한지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사고(思考)가 이루어지는 정신공간이다.
전시 출품작의 제목이
여러 연작 중에서도 작가의 세계관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미학 강의』에서 헤겔은 예술작품은 “단순히 외적이고 감각적이며 무상한 것과, 그에 반대되는 순수한 사상을 서로 화해시키는, 즉 자연 및 유한한 현실과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사유의 무한한 자유 사이를 최초로 화해시키는 중간자”[1]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김민정은 ‘결’을 만들어서 이 중간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가 다루는 결은 일차적으로는 종이의 표면에서 드러나는 결이지만, 그것은 종이가 만들어지기까지 나무와 자연이 빚어낸 결이며, 종이를 만지며 작가 스스로가 다듬어가는 사유의 결이다. 손으로 만져보고 숨을 내쉬며 느껴지는 감각의 세계에서 출발하였으되, 이를 통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원리를 깨우치는 일이다. 그래서 김민정에게 결을 만들어 가는 것은, 모양이 없는 세상의 원리, 즉 동양 철학의 ‘기(氣)’나 서양 철학의 ‘절대정신’, 혹은 과학에서 ‘에너지’라고 부르는 것에게 형태를 부여하는 것인 동시에 불변하는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자기 수양의 과정이다. 최근 김민정은 자신이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존재의 뜻을 옮기는 사제(司祭)와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한다. 이미 그는 자신이 그와 같은 매개자임을, 예술가의 궁극적 소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1]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헤겔의 미학 강의 1』, 두행숙 옮김 (서울: 은행나무, 2015), p.39
- 김소라 (큐레이터)
작가 약력
김민정은 1962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우현 장은정으로부터 서예와 강연균 화백으로부터 수채화를 배웠으며,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Brera Academy of Fine Art로 진학, Maurizio Bottarelli 교수의 지도 아래 수학하였다. 이후 이탈리아에 체류하며 창작 활동을 펼쳐왔으며, 최근에는 프랑스와 미국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베니스의 Ca’boto에서 저명한 독일의 미술사가이자 큐레이터 Jean-Christophe Ammann이 기획한 개인전 《Minjung Kim: The Light, The Shade, The Depth》 (2015.05.05~09.27)을 개최하여 전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 외 지난 20여 년 간 Fondazione Palazzo Bricherasio (Torino, Italy), Museo Comunale (Ascona, Switzerland), Henry Moore Institute (Leeds, UK), Guanshan Yue Art Museum (Shenzhen, China), Macro – Museo Arte Contemporanea (Rome, Italy) 등 해외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하였다. 또한 Johnson Museum of Art at Cornell University (New York, USA), Brooklyn Museum of Art (New York, USA) 외 다수의 공공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주요 개인전
2015 결, OCI Museum of Art, Seoul, Korea
“Minjung Kim: The Light, The Shade, The Depth”, Ca’boto, Venice, Italy
(curated by Jean-Christophe Ammann)
2014 Oko, New York, USA
Studio d’Arte Raffaelli (Palazzo Wolkenstein), Trento, Italy
2013 Patrick Heide Contemporary Art, London, UK
2012 Macro – Museo d’Arte Contemporanea, Rome, Italy
2009 Galleria Valeria Bella Stampe, Milano, Italy
2007 Guanshanyue Art Museum, Shenzen, China
2006 Fondazione Palazzo Bricherasio, Torino, Italy
2003 Museo Comunale di Ascona, Ascona, Switzerland
주요 단체전
2015 Happy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Paintings, Kang Collection. NY, USA
2014 Abstraction: 1911-2014, Leslie Sacks Fine Art, Los Angeles, USA
2012 World, Ermanno Tedeschi Gallery, Tel Aviv, Israel
2009 Across the cross, Trapani, Italy
2008 “Prospects and interiors-Sculptor’s drawings, Henri Moore Institute, Leeds,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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