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10–18시
작가이름
씬킴전시명
《버려진 미래》기간
2015. 06. 18 - 07. 14장소
OCI미술관혼연일체(渾然一體)로서 감통(感通)의 원기(元氣)
천지만물의 원기(元氣)를 유기체의 과정으로 탐구하고 있는 씬 킴(Ssin Kim)은 오늘날 주목받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에 걸맞게 우주론과 자연관, 그리고 동양철학과 예술성에 심취한 듯하다. 지금껏 그의 <황금지대(golden area)>와 <부드러운 장소(soft place)> 연작은 인간이 느끼는 감통(感通)의 입장에서 숭고와 경외감, 공포심을 주로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서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인류와 문명에 신선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의 상생 관계를 강조하려고 한다.
<황금지대> 연작은 대자연의 웅혼한 느낌을 ‘역(易)’의 순행 이치로서 풀어낸다. 이른바 무모하게 자연에 다가선 인간의 태도를 수정하려는 작가의 문제의식이 짙다. 그런즉,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려는 모습을 상징화하면서, 한편에서는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부드러운 장소> 연작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발생하는 동물학대를 경고하고 있다. 이 연작은 그렇게 죽어간 동물들의 쉼터이자 안식처를 상징한다. 생명의 존엄성을 정(情)과 연민의 감정으로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 동물의 영혼을 달래며, 자기 속죄를 담으려는 작가의 인간미가 배여 있다. 그러한 실천을 다스리는 마음의 모습은 양명학(陽明學)의 왕수인(王守仁)이 성정(性情)을 강조한 ‘심즉리(心卽理)’의 논법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로써 <창세 이전에(before the beginning)>에서 태초의 모습을, <끝의 시작(Beginning of the end)>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버려진 미래(last days of us)>에서 인류 최후의 모습을 진지하고도 무심(無心)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다. 무욕(無慾)의 입장이어서 자연을 끌어안으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형편이다. 그의 말처럼, “어떻게 하면 현대인들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까”를 무아(無我)의 궁극으로서 궁리하고 있다. 이른바 여기서의 조화는 만물일체(萬物一切)의 순리를 따른다.
특히 <창세 이전에>는 마치 천지개벽 이전의 혼망(混漭) 상태를 재현하는 듯하다. 이 역시 속박됨에 물들지 않는 무염(無染)의 자세로 접근하려는 의지 탓이다. 무염함은 곧 이미 물들어감에서 멀어졌다는 의미이다. 자연에 굴복(submission)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헛된 욕망을 버리고 무위(無爲)로서 운필(運筆)을 다스리는 까닭이다. 이는 용묵(用墨)이나 필치(筆致)의 쓰임새에서도 집착을 버리려는 흔적이 확인된다. 묵빛의 현현(玄玄)함과 금분의 조화는 인간과 자연의 또 다른 유기체 관계를 자아낸다. 그러므로 바라만보는 경물(景物)의 축적에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무소유로서 만상(萬象)을 잊는다.
자고로 망심(妄心)이나 망념(妄念)을 따진다는 태도에는 이미 경계가 설정된 연후에 나타나는 집착 현상이 서려있다. 견(見) 역시 바라보기 때문에 보지 못함을 동시에 동반하는 업(業)의 심성(心性)이 일어나는 결과로서 가능하다. 따라서 잊혀짐(妄)은 잊으려는 마음에서 상대화로서 발생하므로 그 자체를 아예 망각할 생각조차도 갖지 말아야 옳다.
더 나아가서 명경(明鏡)의 원리처럼, 거울에 상(像)이 맺힘은 또 다른 영상(影像)을 자아내는 식별이 요구된다. 이는 분별의 식견으로서 안식(眼識)이 주어져도 그 상이 안과 밖을 두루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얽히고설켜 엮이는 인연인 반연(絆緣)으로서, 서로서로가 비추는 무분별상(無分別相)으로 잔류하게 된다. 어쩌면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phenomenology)에서 “사이 세계(l´intermonde)”를 표방하는 애매성, 그리고 “서로서로 뒤섞인 관계(le rapport d´Ineinander)”(M. Merleau-Ponty, Résumés de cours, Gallimard,1968, p.177.)와 유사한 형국을 취한다. 그런 차원에서 씬 킴의 그림에 나타난 음양의 법칙,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 동정(動靜), 장단(長短), 고저(高低)의 필법에는 집착이 없어 보이며 반연의 묘리를 드러낸다.
혹여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생각이 표현의 형세마저 지배할 경우, 번뇌의 잔존물인 습기(習氣)로 인해 미혹(迷惑)의 경계에서 해탈(解脫)을 얻지 못한다. 분명 인간과 자연의 문제는 혼돈(混沌)으로부터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을 주재(主宰)하는 순리로 이해하여야 마땅하다.
이처럼 자연을 유기체 입장에서 접근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시간관이 회전 주기로 점철된 탓에 지극히 순응과 영속성을 유연하게 낳는다. 이를테면 자연은 유기체철학(philosophy of organism)으로 이해된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가 이성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과 관련하여, 물리로서 해체에 대항하는 기운이 자연에 서려있다는 논리와 짝을 이룬다. 즉, 그가 “피조물은 사라지지만 또한 불멸한다(The creature perishes and is immortal)”(A. 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The Macmillan Co., The Free Press, 1969, p. 99.)는 논리에는 소유가 깔려있지만 순응(conformation)을 요구하는 경우 시간관이 함유된다. 이러한 시간관은 영속성(permanence)을 전제하는데, 그래서 직접성(immediacy)을 떠난 영상(moving)은 순간순간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되살아난다. 이를 두고 주체(subject)로부터 아예 사라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씬 킴의 그림은 이러한 상호 순환의 유기 관계를 놓치지 않고 있으며, ‘변환’으로서 ‘합생’의 구조마저 이해하고 있다.
그런 즉, 화이트헤드의 유기체는 ‘변환(transmutation)’으로서 파악된다. 이른바 상호 발생의 관계가 전제된 탓에, 그 어디에도 한정을 짓지 않는다. 이는 동시태(contemporaneousness)로서 인과(causal) 관계를 엮는다. 곧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로 이전하는 작용을 파악(prehension)으로 느낀다.(A. N. W, Process and Reality, p. 155.) 이러한 파악은 우주의 수많은 개체가 하나의 구조로 통일되는 일원의 과정으로서 ‘합생(concrescence)’을 반영한다.(A. N. W, Process and Reality, p. 79.)
이제 대자연(天下)을 바라보는 인간의 자세는 정복과 소유로부터 벗어난 상생의 조화, 즉 ‘변통(變通)’의 이법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이에 따라 씬 킴은 숭고와 경외감이 느껴지는 존재로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를 만물의 변통으로 자아내려고 시도한다. 그의 자연관은 필(筆)과 묵(墨)이 서로 혼연일체(渾然一體)를 이루는 지경이다. 의미나 형식에 욕심이 없는 탓에 별도의 작위가 필요치 않다. 그래서 무위를 따르고 무욕에 순응하는 대자연을 품어낼 수 있다. 이를 두고 천지(天地)의 혼돈(混沌) 상태, 곧 ‘인온(絪縕)’을 펼치는 형세라 부른다. 최소한 ‘인온’은 작위를 잊고 사로잡힘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짙다. 왜냐하면 작위는 언젠가 소멸을 양산하게 되며, 또한 사로잡히게 되면 소유의 욕망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만물을 상대하는 태도가 그저 스스로 흘러감을 우주의 순리로서 따라야 온당하다.
씬 킴의 그림에 드러난 대자연의 위엄과 위압은 과히 대천지의 웅장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웅혼하게 요동치는 만물상은 그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어 보이는 ‘무작위’를 추구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경외감과 외경감이 동시에 겹친 듯하다. 이러한 연작들은 태초의 모습이나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세계, 즉 자연의 숭고함과 경이로움에서 천지자연이 왕성하게 펼쳐지는 ‘봉발(逢勃)’의 기세를 느낄 수 있다. 천지는 일체(一切)의 경물(景物)이 만물을 이루는 형국이다. 이를 비유하면 노자(老子) 40장에 “천하만물은 유에서 드러나고, 유는 무에서 드러난다(無法生有法)”는 말과 같은 섭리이다.
이에 그가 표현하려는 대자연의 운필(運筆)에는 홀연히 혼화(混化)로서 융화(融化)를 품어낸다. 이른바 만물이 혼연(渾然)하여 일체(一切) 원만하니 혼목(混穆)을 머금는다. 말하자면 혼목하니 원만한 공경이 따르고, 원만하니 고요가 찾아든다. 그러므로 혼연하고 고요하여 목연(穆然)을 끌어안는다. 이로써 욕심 없는 모양으로서 담연(澹然)을 이룰 수 있다. 역시 ‘역(易)’의 순리와 다를 바 없다. 이른바 ‘역’은 형체도 사고도 이행함이 없는 까닭에 스스로 고요하면서도 감(感)함을 서로 교환하는 이치이다. 그의 산수 형세는 맥과 맥으로 연결되어 높고 낮은 봉우리가 빼어난 봉만(峰巒)을 이루니, 구애받지 않는 쇄락(灑落)을 점점 형성하게 된다. 이럴 경우, 신묘한 운치의 신운(神韻)과 더불어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쇄탈(灑脫)스러움을 얻을 수 있다.
한편 생성과 소멸이 쉼 없이 운행되는 자연의 원기에는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 vijñāna)의 연기론(緣起論)과도 같이 윤회(輪廻)의 이치를 따른다. ‘인연생기(因緣生起, patītya-samutpāda)’라고 일컫는 연기론은 직접원인(因)과 간접원인(緣)으로서 윤회의 공(空)사상에 근간을 이룬다. 따라서 세상 만물은 융화의 순리로서 작동의 순환 고리를 끊임없이 잇는다. 이것은 작가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그가 담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역시 ‘인연생기’의 순리로서 바라보고 있다. 인간이나 자연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無二) 상생의 섭리를 끌어안는다. 언필칭 분별이 없어서 분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까닭에 ‘무분별(無分別)’로 남는다. 나누어지지 않으므로 이미 하나라는 말이다. 이를테면 자연의 순행 질서로서 무한대(無限大)와 무한소(無限小)를 동시에 발출한다.
이제 자연을 우주의 원기로 섬기려면 융화로 다가서야 온당하다. 이른바 마음의 욕정과 침탈의 흉물을, 데리다(Jacque Derrida)가 강조한 “흔적(trace)은 곧 자기의 삭제(erasure of selfhood)”임을 되새길만하다.(Jacque Derrida,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78. p. 230.) 어떻게 보면 인간이 자연에 저지르는 몽매한 행동은 욕망(desire)의 단편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욕망은 “요구(demand)와 욕구(need)가 분리되는 여백(margin)의 범위에서 형성”(J. Lacan. Écrits, New York·London, 1977, p. 311.)된다는 라캉의 말처럼 여기에는 소멸(obliteration)과 소유로서의 충족 의지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잠식시키려는 태도이다. 씬 킴이 그림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이제 인간과 자연은 상호소통(communication)의 대화(colloque)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대인은 공적(空寂)한 마음으로 청정(淸淨)함을 자연과 공유하여야 마땅하다. 그런 이유로 그의 그림과 사상에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융화를 만끽하려는 자태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어서 지속으로 관심과 찬사를 받을만한 작가이다.
- 황의필(미술평론가)
작가 약력
학력
2014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화과 석사 졸업
2009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학사 졸업
단체전
2015 버려진 미래, OCI미술관, 서울
영&영 아티스트 프로젝트, 영은미술관, 경기
회화 – 세상을 향한 모든 창들, 블루메미술관, 경기
2014 아시아프, 문화역서울284, 서울
2013 동동서성이중홍, 이화 아트센터, 서울
2010 월간「퍼블릭아트」선정작가 36인 ‘헤이리’에서 날다, 리앤박갤러리, 서울
2009 제31회 중앙미술대전 선정 작가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수상
2014 2015 OCI YOUNG CREATIVES, OCI미술관
2010 월간 퍼블릭아트 선정작가
2009 제 31회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
소마드로잉센터 아카이브 4기 드로잉 선정작가
이메일
artistss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