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10–18시
작가이름
황지윤전시명
《Variation of Landscape》기간
2012. 05. 03 - 05. 27장소
OCI미술관풍경화의 디아스포라, 그러나
“그리고 그곳에는 광막한 바다를 건너기 위한 목적으로 특별히 건조된 범선들을 타고 바다를 횡단하는 수부들에게 수정같이 번쩍여 보이는 지붕을 한, 빛나는 궁전이 하나 솟아있나니, 그리하여 그곳에 그 나라의 온갖 짐승들과 떼 지은 살찐 가축들 그리고 최상의 과일들이 모여드는지라”
– James Joyce, Ulysses
1. 지금 회화의 위치
디아스포라(diaspora), 한자로 이산(離散)은 애초 민족이 자신들의 고국에 집단으로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혹은 고향을 상실하고/뿌리 뽑힌 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흩어져 사는 처지를 뜻하는 단어다. 따라서 이 용어를 그림에 가져다 쓰는 일이 부적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원천을 잃어버리고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모든 존재가 사실 디아스포라 상태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림에 그 말이 적용되지 못할 법도 없지 않은가?
특히 오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즐겨 그리는 그림의 스타일을 보건대,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현대 회화의 유행하는 특정 경향 내지는 방법론을 설명하기에 꽤 유효적절한 것 같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문인화의 외관을 차용해서 지금 여기 사물들을 그린 그림, 중국 명 ․ 청시대의 산수화 구도를 빌려다가 그 속에 오늘날의 다종다양한 일상사를 끼워 넣은 그림, 17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풍경화나 정물화 양식에다가 21세기 디지털 대중 문화산업시대의 이미지 및 상품을 조합해 그린 그림들 말이다. 그런 그림들에서는 본래 신화화, 종교화, 문인화, 산수화, 풍경화, 정물화, 누드화, 초상화, 알레고리회화 등등이 태어나고 하나의 회화 형식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문맥/고향/원천은 사라진다. 대신 시각적 요소들만 파편화된 채 등장한다. 이제까지 동서양에 존재해온 회화 일반을 민족 같은 것으로 인간화해도 좋다면, 그렇게 양식 ․ 도상 ․ 모티브 ․ 장식적 파편들로 따로 떼어 내져 이 작가의 저 그림에, 저 작가의 이 그림에 차용되거나 이식되는 기존 회화의 형편은 그야말로 현세의 잡다한 이미지세계를 방랑하는 디아스포라에 다름 아니다.
2. 표면의 여정
황지윤의 그림들 또한 일견 위와 같은 의미에서 회화의 디아스포라, 특히 풍경화의 디아스포라처럼 보인다. 그녀가 2007년부터 현재까지 그린 그림들 중 다수가 기존 동서양 회화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고, 아마도 우리가 익히 봐온 덕분에 친숙해진 양식화의 소재, 구도, 형상, 표현 기교 등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이 젊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알고 그랬다기보다는, 이제까지 받은 미술교육과 경험한 시각문화를 통해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형성한 상상력에 따라 그린 그림들이 그렇다는 얘기다. 가령 황지윤의 작품에서 우리는 중국 북송시대 산수화나 조선시대 청록산수화부터 이발소그림의 전형인 다산(多産)의 돼지 그림이나 자연물을 의인화한 민화(民話)까지, 두루 기존 회화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또는 고대 로마의 프레스코 벽화 및 15세기 르네상스의 제단화에 구현된 신화적 풍경, 17세기 북유럽 바로크의 드라마틱한 풍경,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숭고한 풍경 등등을 꼽아볼 수도 있다. 예컨대 황지윤은 <조춘도(早春圖) 1>에서 중국 북종산수의 대명사로 꼽히는 곽희(郭熙, 약 1001~1090)의 동명 그림을 직접적으로 ―주제부터 구도까지― 모방한다. 또 <달빛그림자 2>에서는 전체적으로 전경 ․ 중경 ․ 후경이 있는 산수화의 전형적 구도를 취하는 가운데, 그림 곳곳에 문인화 또는 키치그림에 흔히 등장하는 모티브를 패치워크처럼 잇댔다. 즉 세로로 긴 화폭의 호방한 산수풍경 속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깨알 같이 그려 넣은 것이다. 중경의 오른쪽에서는 물레방아가 돌고, 왼쪽에서는 주렁주렁 새끼돼지를 품은 어미돼지가 누워있으며, 그 밑에 선사와 시동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다리를 건너고, 물가에서는 낚시질하는 이가, 후경 부분 나무 밑에서는 중년의 남자가 마치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에서 늙은 선비가 그러듯 물을 보며 서 있고.
캔버스 위에 유화물감으로 꼼꼼히 덧칠해 그린 황지윤의 그 이종(異種) 산수화에서 회화의 원전(原典)들은 전통의 깊이를 고수하지 못하고 화면 여기저기를 떠돈다. 동시에 애초 그것들이 속했던 관계가 아니라, 생경하고 다소간 뜬금없는 사이로 연접하며 이미지의 퍼레이드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감상자 또한 그림 표면의 곳곳을 유랑하는 양식화된 회화의 파편들을 따라 회화 전통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나 감상법 없이도 즐길 수 있다. 마치 이국의 다양한 풍경들을 인공적으로 한데 모은 테마파크를 누비듯이. 신구(新舊), 성속(聖俗), 동서(東西)를 가로질러 온갖 문화의 형상들이 미니어처로 재현된 민속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안을 들여다볼 때처럼.
3. 경험의 여행
하지만 황지윤의 작품은 차용(appropriation) 개념을 표방한 포스트모던 회화가 아니며, 그녀의 작업 태도 및 방식은 유희적 혹은 비판적인 목적에서 전통문화예술/민속적 이미지를 브리콜라주(bricolage)하는 동시대 다수 젊은 작가들의 범주와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우선 황지윤의 그림들이 곽희의 <조춘도>를 모방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과거의 특정 그림과 1:1 대응관계에 있지 않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녀의 풍경화는 일정 정도 우리가 그것을 처음 봤을 때 어디서 본 듯이 느낄만한 시각적 친밀성을 지니고 있다. 혹은 오래전 동양이나 서양의 미술사에 등장하는 대가들이 일가를 이뤄놓은 양식을 장르나 주제에 상관없이 가볍게 가져다쓴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시각적 인상으로만 그렇다. 반면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황지윤의 그림들에는 참고문헌처럼 달릴만한 개별 원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화집의 도판들에서 고스란히 따온 도상들 또한 없다. 대신 그녀는 화면의 구성, 정조(tone), 표현 기법 등 구조적인 차원을 모방하거나 재구성한다. 물론 누군가는 그것이 바로 황지윤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여러 젊은 화가들이 엇비슷하게 취하는 방식이라고, 그러므로 각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모방이나 재구성 자체가 탈 맥락화, 파편화, 이종의 혼성을 유행처럼 따르는 경향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범주화해버렸을 때도 남아있는 개별성이 황지윤의 그림에는 있다. 이미지의 경험과 경험의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엮이는 점, 테크닉의 학습과 상상력의 실행이 병행되는 점이 그것이다.
굳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자면, 황지윤은 국내외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낯선 풍경과 세태를 몸소 겪는 여행자이자, 동시에 도서관에 앉아 골똘히 회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들의 화집을 들여다보고 스튜디오에서는 그런 그림그리기(painting)를 연마하는 견습생이다. 이 두 상반되는 모습, 또는 병행이 불가능해 보이는 삶의 태도 내지는 작업의 방식이 황지윤의 그림을 개별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녀는 실제로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국내의 지방 소도시든 유럽의 관광지든, 혼자 하는 배낭여행이든 패키지여행이든 가리지 않고 수시로 여행을 떠나며, 그 여행의 와중에 얻은 경험들을 토대로 그림을 그린다. 그 경험은 심리적이거나 정서적으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들이 별반 아니다. 그보다 때로는 혼자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 벽에 걸린 키치 그림을 따라 스케치하거나, 어떤 여행지에서 폭우와 화재가 동시에 일어나는 광경을 먼발치에서 구경하며 나중에 꼭 그것을 그려보겠다고 생각하는 식의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경험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혹은 그것을 경험했던 때로부터 시간이 상당히 흐르는 동안 황지윤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익명의 풍속화를, 갑자기 마주쳤던 기이한 사건을 중국의 산수화나 낭만주의 풍경화 구도에 접목하고 그 안에 녹여내는 작업을 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기존 회화 양식과 모티브를 참고하고, 테크닉을 변주하는 것이다. 예컨대 앞서 소개한 <달빛그림자 2> 속의 물레방아와 돼지 그림은 그런 경험에서 재구성된 것이며, <롯의 증언 Ⅰ>에 그려진 검은 구름 밑 폭우와 섬 안의 불길이 그렇게 재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롯의 증언 Ⅱ>는 그 폭우의 정경을 뚫고 들어갔을 때, 그 안에 벌어지고 있을 자연의 사태를 작가가 자신의 상상과 신화의 힘을 빌려 알레고리화한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그 정경은 1513년 경 피에로 디 코지모(Piero di Cosimo)가 그린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를 환기시킨다.)
위와 같은 두 방향의 의미, 즉 한편으로는 기존의 회화적 양태나 속성이 부분적으로 발췌돼 황지윤의 그림 표면을 떠돈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 화가 자신이 세계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경험한 부박하지만 독특한 사태들이 그림에 이미지화된다는 의미에서 황지윤의 회화는 ‘디아스포라 상태’의 것이다. 그것은 일견 정처 없고 원본 없는 이미지들의 유희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지젝(Slavoj Žižek)이 언어 분석을 통해 명쾌하게 정의했듯이, 우리 각자의 주관적 경험이 다른 이들과 섞일 수 없고 다른 무엇으로도 유보할 수 없는 개인성(the in-dividual)을 마련해주는 것이라면, 황지윤의 작품에서는 그녀의 떠돌이 경험, 그 경험적 지각이 바로 고유한 성향이 되고 특별한 정조가 된다.
4. 유사성의 여러 세계
우리가 현재 우리 자신 안에 형성해놓은 그림 혹은 시각이미지의 세계는 어디서 왔는가? 많은 경우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본 것들, 즉 시각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감상한 작품들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물들, 풍경, 겪은 사건이나 본 것들이 우리의 상상력 및 기억력과 결합해 일종의 이미지 저장고이자 생산처로서 우리 안에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이 글의 서두에 인용해둔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즈 Ulysses』의 한 장면은 읽는 이에게 스펙터클한 풍광과 찬란한 인공물과 풍요로운 자연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작가의 고향이자 작품의 배경이 된 아일랜드 더블린의 어느 시장을 묘사한 것이다. 말하자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정경이 누대에 걸쳐 축조된 문학적 표현법과 만나고, 조이스라는 저자의 개별적 삶의 경험 및 상상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문학 실험과 결합하면서 광대한 바다, 위용 넘치는 범선, 수정 궁전, 육감적인 짐승 떼, 윤택한 과일더미 이미지를 출현시킨다. 우리에게는 그 이미지가 애초 초라한 도시의 시장이라는 사실이 크게 실망스럽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그 초라한 실제 세계와 황홀한 문학이미지의 세계는 오히려 우리 안에서 유사성의 즐거운 관계 맺기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황지윤의 그림들을 통해서도 그 즐거운 유사성의 관계가 촉발된다. 앞서 분석했듯이 그녀의 작품들에는 분명 기존에 그려졌던 회화의 양식과 모티브가 모방돼 있기 때문이며, 그와 동시에 황지윤만의 경험과 상상력이 그 모방 대상들을 독특한 정조를 풍기는 풍경화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녀의 그림을 친숙해하면서, 그러나 바로 그 자체만의 특별한 이미지로 바라볼 수 있다. 또는 이러저러하게 알고 있는 것과 눈앞에 펼쳐진 화폭 속 특이한 미적 대상을 요소요소 따져가며 즐거워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황지윤의 그림이 지닌 미덕이고, 황지윤이 참조한 회화의 여러 양식과 모티브가 그 신참 작가에게, 그리고 감상자에게 행사하는 이미지의 힘이다.
이제 황지윤의 작품 중에 그 이미지의 힘을 간단하지만 명쾌하게 보여주는 <청솔모>라는 제목의 드로잉을 논하면서 글을 마치기로 하자. 그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서 오른쪽 끝에 그려진 소나무와 매우 닮아 보이는 나무 한그루를 화면 가득 배치해 푸른 잉크 선만으로 그린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연관관계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연상 작용에 의한 것으로, 애초 작가에게는 그런 의도가 없었을 수도 있고, 다른 감상자는 그런 연관성을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청솔모>는 보는 이에게 푸른 소나무의 기상이 느껴지는 소박하지만 담대한 그림으로 비춰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여기며 한 걸음 바짝 다가서서 작품을 보면, 이내 감상자는 그림 속의 나무가 소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소나무 솔잎인 양 가지에 뭉쳐있는 것들은 다소 놀랍게도 작은 짐승 떼, 작품 제목을 참조하자면 ‘청솔모’라 불리는 다람쥐과(Family Sciuridae)의 동물들이다. 보통 다람쥐보다는 몸집이 크고 현재 남한에서 그 개체수가 현저히 늘어났다고 하는 이 동물은 큰 나무줄기나 나뭇가지 사이에 서식한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황지윤의 <청솔모>는 바로 그러한 사실들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가지를 뻗은 소나무, 그것처럼 보이는 청솔모 떼를 표현해 놓았다. 차가운 흰 여백의 공기 속에서 고고하게 서있는 소나무 몸체는 한순간 날짐승의 소란스러운 몸짓들로 바뀐다. 청빈한 나뭇가지들은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무리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검은 몸과 두툼한 꼬리의 동물 떼거리가 된다. 다소간 무섭고, 다소간 징그럽게도. 어디서 그러한가? 우리의 지각 과정에서. 여기서 핵심은 그 지각의 과정이 황지윤의 드로잉이 없었다면 촉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점에서 디아스포라처럼 화면을 부유하는 회화 이미지의 힘이 센 것이다.
- 강수미 (미학)
작가 약력
학력
2011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전문사 졸업
2008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예술사 졸업
개인전
2021 마음의 빛, 한원미술관 , 서울
2020풍경의 눈, 전시공간 (KSD 한국예탁결제원 후원) , 서울
2019 수집된 풍경, 오스 갤러리&공간시은 ,완주 전주
2014바람 불면, KUMHO YOUNG ARTIST – 금호미술관 , 서울
2013 풍경 과 기억, GS타워 갤러리 , 서울
소리에 민감한 풍경, 카페 드 유중갤러리 , 서울
2012 Variation of Landscape, OCI미술관, 서울
2011둔갑술 풍경, 175갤러리, 서울
단체전
2021 환상의 정원 키미아트 , 서울
Knocking the Door 아트스페이스 이색 , 서울
2020 BT ART GROUP BT갤러리 ,서울
2019 16번의 태양과 69개의 눈 금호미술관 , 서울
nature- ARTMORA , 미국
2018 ARTMORA Brooklyn , 미국
2017 채움으로부터 Out of Unfilled Fullness 175갤러리 , 서울
2016 초현실적 대화 Surreal Dialogue 워싱턴 문화원 , 미국
2015 상호시선 공간시은 & the orchard , 전주
육감 六感 sixth sense- OCI 미술관 , 서울
2014 치유의 기술 – 비움과 채움 제주도립미술관 , 제주도
전북아트쇼 한국소리 문화의전당 , 전주
길들어진 밤 우민아트센터 , 청주
별별동행 OCI , 광양 포항 영주 군산
2013 경계의회화전 금호미술관 , 서울
2012 BOB UP O’s 갤러리 , 전주
artspace H , .서울
2011伸인상전 금산갤러리 , 서울
신인상전-기지개를 펴다, 금산갤러리, 서울
신인상전-기지개를 펴다, 금산갤러리, 헤이리
A.C, 성균관갤러리, 서울
2010 인사미술제, 공아트스페이스, 서울
열사흗날 밤-회화 일별, 한국예술종합학교 Karts gallery, 서울
삼각지 미술 예찬, 캔 파운데이션, 서울
rare flash, 한전아트센터, 서울
매일매일 오프닝, 175갤러리, 서울
2009 해석에 반대한다, 인터알리아, 서울
천장산을 넘어서, 경희대학교 미술관, 서울
fantasia, 가나아트갤러리, 부산
2008 젊.은. 작가 읽기, 스페이스 판, 서울
2007 대화의 방식, 정소영갤러리, 서울
Open-End,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
레지던시
2017 OCI 미술관 (종로) 레지던시 입주작가
2015 강동리사이클아트센터 Studio
2012 미술원창작지원공간 Studio 683 2기 , 서울
수상
2019 한국예탁결제원 KSD 미술상 최우수상 수상
2014 KUMHO YOUNG ARTIST , 금호미술관
2012 송암문화재단 OCI YOUNG CREATIVES , OCI미술관
2011한성백제미술대전 입상 , 송파구미술관
2012 OCI YOUNG CREATIVES, OCI미술관
이메일
koala01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