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 작가이름

    공성훈, 김종학, 김태호, 박현수, 설원기, 오원배, 이길우, 이상봉, 이석주, 임옥상, 주태석, 지석철, 최경한, 황용진, 황주리
  • 전시명

    《사유의 방》
  • 기간

    2011. 10. 26 - 11. 20
  • 장소

    OCI미술관

전시서문

감성이 차분해지는 계절을 맞았다. 사유는 흔히 인간의 이성작용을 가리키는 말로, 시대의 철학과 문화의 의식 구조 속에서 인류의 존재를 규정하고 예술 표현의 근간이 되어온 키워드이다. 오늘날, 문명의 고도성장과 문화의 다변화라는 첨단의 환경을 이룬 데에는 이성의 활약에 의한 바가 클 것이다. 그러나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사고의 틀이 요구되는 시대 속에서 사유는 정신작용의 층위에 닿아 있는 사색, 성찰, 명상의 영역을 아우르며 현대인의 정신적 미완과 심리적 불안을 치유하고 정화하는 보편적 의미로까지 확장되는 듯하다.


 


이번 전시는 우리 시대의 확장된 사유의 범주에서 현대인의 복잡다난한 삶의 순환구조를 관조하고 심리적, 정신적 지표와 가치를 재정립해보고자 기획되었다. 이를 위해 우리미술관의 소장작품과 소장작가의 작품 중에서 존재의 근원적 표상을 좇아온 동시대 작가 15인의 작품 20여 점을 선정하여 그 예술의 여정을 파노라마식으로 만나보고자 한다.


 


<사유의 방>은 순수한 조형언어를 통해 인간이 향유해야 할 건강한 미의식의 회복을 주장하는 예술가의 사유와 그것에 마주하는 감상자의 사유가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서로 소통하기를 바라며 더 나아가 삶의 가치와 진정성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고자 한다.


 


1부 사라진 풍경 – 모든 형상이 사라진 심상의 풍경과 마주하다


 


설원기는 지나간 시간 속에 축적되어 심상에 뿌리를 내린 아련한 추억과 경험들을 추상의 언어로 풀어낸다. 직선과 곡선, 원형과 사각형 등 조형의 기본 요소들로 가득한 화면은 시적인 감성의 울림을 전해주거나 다층적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이러한 형상들은 모두 자연 자체를 상징하고 보는 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감성의 자극을 통해 사색으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제 현실 너머의 예술 공간은 추억을 다시 추억하는 시․공간으로 공유되며, 우리 안의 기저에 자생하는 그 무엇을 조금씩 부유하게 한다.


 


이상봉은 문명의 상징인 기호와 상징의 근원인 자연을 형상화하여 인간의 의식과 생존을 둘러싼 흔적을 조명한다. 기호나 자연의 흔적은 유장한 시간이 압축되어 화석화된 것처럼 녹슬고 부식된 금속판의 이미지로 나타나 지난한 시간의 여정을 가늠하게 한다. 여기에 에메랄드 색조가 어울려 생동감과 생명 연장의 의미가 더해진다. 이로써 시작도 끝도, 경계도 알 수 없는 시․공간에서의 사유가 시작된다. 즉, 선, 점, 얼룩, 투박한 질감 등 수수께끼 같은 사유의 알레고리들은 씨앗, 꽃, 나뭇가지, 열매, 깃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점점 본래의 의미를 넘어서서 무한의 상상과 호기심, 텍스트를 변칙적으로 생산해 나간다.


 


김태호는 시적인 동인이나 소담한 정서에서 발현된 공감의 영역을 다층적 색면 회화로 압축해낸다. 대부분의 형상이 제거되어 지극히 환원적이고도 평면적인 색면의 화폭은 작가의 지난 삶으로부터 배어나온 모든 기억과 추억, 감성들이 하나의 색으로 용해되어 나타난 것으로 근원에 대한 성찰과 사색의 단초를 제공한다. 특히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인 색면의 레이어들은 미니멀하면서도 물성이 가득하여 오히려 촉각적이며 체온이 감지되는 감성의 영역으로 이어져 오랜 시간 저편의 아마득한 깊이와 흐르는 강물처럼 번지는 심상의 고요, 평화와 마주하게 한다.


 


최경한은 자연과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깊은 성찰과 관조를 표상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해왔다. 존재에 대한 명상과 수양을 통해 주제를 선택하고 물리적인 형상을 초극하는 추상화의 자율정신을 표현수단으로 하여 자연의 신비와 오묘함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삶의 진리와 진정성을 담아내고 있다. 이는 활달한 붓놀림과 침잠한 색감, 미묘한 색조의 변화와 같은 순수한 조형 어휘를 통해 음율과 기운의 충만함으로 구체화되는데 결국 예술의 본질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진중한 명제들까지 발견하게 한다.


 


박현수는 그랜드 캐니언에서 체험한 빛의 감흥을 다층의 색채 구조와 추상적 개념 및 형식으로 제시한다. 원의 형상과 검은 배경은 빛의 광휘와 그림자를 상징하며, 동시에 작은 색면들이 모여 만든 형상은 자연과 우주의 미시적 혹은 거시적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그의 작업은 드리핑기법으로 화면을 가득 메우고, 그 위를 색면으로 완전히 덮은 다음, 표면이 다 마르기 전에 고무칼로 바탕을 걷어내면서 형태를 드러내는 다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고도의 집중력과 치열한 행위가 수행자의 행보처럼 이루어지는 까닭에서인지 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심연을 경험하게 한다.


 


2부 존재의 회귀 – 다시 현실에서 마주한 모든 존재는 위대하고 숭고하다


 


임옥상은 한국사회의 성장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적 사건과 이념, 인간관계의 순환구조를 다양한 예술언어로 진단하고 저항하고 동참해왔다. 최근에 시도된 도시 시리즈는 인간과 도시가 함께 이루어온 역사의 단층과 의미를 돌아보면서 그 속에서 굴절되고 간과되어온 도시와 인간의 연대의식, 그리고 그것의 가치에 대해 조명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생태학적 관심이나 환경의 문제들까지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라지거나 잃어버렸던 존재의 의미를 되찾고 다시 푸른 삶으로의 회귀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공성훈은 회화에서부터 영상, 설치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나 주제를 넘나들며 일상의 모순과 간극을 낯선 이방인의 시각으로 풀어왔다. 그의 풍경화는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내면의 공명과 정서적 환기를 유발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감정적 치환의 폭을 조율하고 있다. 즉, 작품 속 풍경은 현실의 풍광을 다루고 있음에도 빛과 어둠의 간극을 다룬 색채와 대상을 담아낸 구도, 표면의 반사효과 등의 이질감으로 인해 판타지 영화처럼 다소 차갑고 비현실적인 감각으로 다가온다. 낭만주의의 감성과 상징주의의 은유가 뒤섞인 듯한 그의 풍경화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자극하는 명징함으로 사유의 폭을 한층 넓히고 있다.


 


이길우는 고전작품을 차용한 풍경화와 유명한 현대인의 인물상을 혼합하여 한국화의 현대적 재해석과 변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한지, 먹, 수간안료 등의 전통적인 재료를 기본으로 하고 향이나 인두로 구멍을 내서 한지를 중첩시키는 독특한 회화 기법을 구사하는 등 동양의 재료와 서양의 주제의식을 아우르는 실험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향불로 종이를 태우는 작업은 향이 제의에서 정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적 퍼포먼스를 전제함으로써 정신과 육체의 완전한 합일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주태석은 오랫동안 ‘나무와 숲, 자연-이미지’ 시리즈를 통해 숲속의 나무와 주변의 생태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해왔다. 빛이 가득한 자연의 이미지는 사진처럼 일루전이 가득하면서도 모든 요소들이 평면의 실루엣으로 완성되어 있어 회화의 사실성과 평면성이 동시에 구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연의 이중적 이미지는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넘어 자연의 이상화를 구현한 것으로, 보는 이에게 자연과 인간, 정신과 물질, 이데아와 현실의 교감을 전해주고 잃어버린 자연의 본질과 본성을 되찾게 해준다.


 


황용진은 자연과 문명,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의 모습을 초현실적인 감성으로 표현해왔다. 순수한 자연을 상징하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대변하는 책, 자동차, 패스트푸드 등을 대비시켜 전혀 새롭고 낯선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의도적인 과장과 왜곡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절대적 진리와, 지위, 권위 등을 조소하고 비판하고자 함이며 그것의 덧없음에 대해 단호히 경계하고자 함이다.


 


이석주는 일상적인 오브제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 풍경을 상상과 서사가 가득한 드라마로 재탄생시킨다. 작가는 1970년대부터 한국 하이퍼리얼리즘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인간을 둘러싼 모든 관계성, 즉 삶의 현장과의 관계, 자연과의 교감 등에 대한 관조적인 시각과 감성을 표출해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소재의 부각을 극대화함으로써 개인과 집단이 공유하는 존재에 대한 자각과 확인, 시공간을 초월한 본질성을 극명하게 조명한다.


 


지석철은 오랫동안 의자를 소재로 하여 인간의 부재와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제안하는 극사실주의 회화를 구축해왔다.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인생의 여정을 한 화면에 응축해 놓은 듯 적막과 우수가 가득하며 인간의 절대고독에 대한 메타포가 철학적 관조와 문학적 격조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낸다. 즉 떠나고 없음에 대한 회한과 새롭게 다가올 존재에 대한 희망이 겹쳐지는 서정시의 조형적 구현이라 하겠다. 특히 일상의 풍경과 마주하는 의자의 안배와 해가 뜨거나 질 무렵의 어슴푸레한 색감이 심연의 성찰에 대해 이야기하는 회화적 메시지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오원배는 현대 문명 속에 감춰진 현대인의 근원적 소외라는 표현주의적 주제의식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다. 주로 어두운 배경의 건축물과 방황하는 듯한 거대한 인체를 병치시켜 문명과 개인의 갈등,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의 실존주의적 의지를 보여주었다. 인간의 형상을 대신하여 등장한 화려한 꽃은 화합과 용서를 통한 소통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와 사회와 인간 사이의 경직된 관계성을 허물고 희노애락을 공유하고자 하는 코스모폴리탄적 사유의 영역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프레스코 기법으로 물기 어린 투박한 표면 질감을 획득하여 현실을 초극하는 시․공간감마저 전해준다.


 


김종학은 전통과 현대의 독자적 회화 영역을 균형감 있게 아우르는 양면성을 통해 회화의 본질과 존재의 본질을 정제해나가고 있다. 무르익은 과일이나 흐드러진 꽃과 같은 자연 소재를 정물화처럼 배치하여 회화적 원전에 닿아 있으면서도 화면 가득 확대하면서 세부의 과감한 생략과 형태의 단축을 통해 모던한 현대적 회화양식을 형성하고 있다. 욕망을 기호화하는 소재의 상징성, 본질에 대한 극적 표현성, 구현방식에 있어서의 동서 혼융의 관점 등 근원과 근원의 변용이라는 경계 위에서 존재의 고유성과 그러한 존재간의 화해를 돌아보게 한다.


 


황주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단상, 혹은 인간 본연의 생태적 기질과 변모에 대한 내러티브를 통해 원초적인 인간성의 회복을 갈망하는 다양한 비전을 형상화해왔다. 특히 격자형의 화면을 단위로 하여 삶의 희노애락에 대한 기록과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그 낱낱의 서술적 공간을 무한히 확장해 나가는 화면 구조를 보여준다. 모든 이미지들은 단순화되거나, 왜곡․과장되고, 상징적 의미를 수반한 소재들의 자유로운 병치를 통해 메시지의 요체를 명료히 드러낸다. 이는 현대인의 심리적, 정신적 불안과 소통에 대한 희구를 직설적 혹은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결국 인간 삶의 구원을 향한 묵시록적 행보의 숭고한 가치를 환기하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 <사유의 방>은 열려있다. 시간, 공간, 감각의 영역을 초극하여 이성과 감성의 공유를 위한 이곳에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잠시 내려놓은 채, 그립고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과의 추억을 향수하고, 실존하는 모든 것들의 가치를 되새겨 보면서 우리의 삶에 다시금 감동과 활력이 충만해지기를 기대한다.


 


- 최정주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