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 작가이름

    조태광
  • 전시명

    《그날 이후 신세계의 풍경》
  • 기간

    2011. 09. 28 - 10. 18
  • 장소

    OCI미술관

전시서문

그날 이후, 신세계의 풍경


 


비극이다. 조태광의 회화는 인간의 비극을 화려하게 새겨 놓았다. 자수나 퀼트의 색색 바느질처럼 화면에 꼼꼼히 한 땀 한 땀 풍경의 세목들을 수놓았다. 가만히 풍경을 응시하노라면 고대 마야의 신전에 새겨진 지구멸망의 예언이나 이집트 파라오의 투탕카멘 부장품, 수메르 문명의 점토판 예언이 떠오른다. 고대 예언의 화살은 인류멸망이 아니라 지구멸망에 있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예언은 2012년으로 아직 도래하지도 않았다. 도래할 예언이 적중할 것인가는 차지하더라도 그들 모두가 지구멸망이라는 완전한 종말을 예언했단 점이다. 조태광이 새겨 넣은 회화적 예언의 실체는 고대의 예언과 달리 인류멸망을 다루고 있다. 인류멸망이라 하나 멸망의 참혹한 현상이나 공포를 그는 재현하지 않았다. 회화 속 비극의 풍경은 ‘인간의 부재’에 있다. 그의 회화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풍경은 그래서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이다. ‘적(的)’이라는 것은 비현실/초현실이 아닐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단 얘기다. 비현실과 초현실이 아니라고 해서 그 풍경이 지금 여기의 실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비현실과 초현실이라고 해서 그 풍경이 지금 여기의 실재가 아닌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아서 인간만이 비극일 뿐인 이 비극을 비극이라 불러야 할지 예언의 징후로 해석해야 할지 멸망의 슬픔을 따져야 할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비극’은 인간 중심의 시선이다. 인간의 부재는 오직 인간만의 비극이므로. 인간 밖의 시선으로 보면 이 풍경은 황홀일 수 있다. 인간이 없는 풍경은 자연의 생장이 온전한 것이므로. 인간은 고대로부터 스스로의 부재를 수없이 예언했다. 예언의 실상을 ‘멸망’으로 몰아붙여 지구에서의 완전한 부재를 떠올린 것은 인간이었다. 어느 누구도 인간의 멸망을 예언하지 않았다. 인간은 인간의 욕망이 자정능력을 상실한 채 결국 파국적 종말을 불러들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숱한 고대의 예언은 욕망의 비극에 관한 것이다. 인간들은 비극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우주의 거대한 힘의 역능에서도 비롯될 것이라 상상한다. 지구의 온난화와 세계 곳곳의 이상 기후 현상을 비롯해 태양계 행성들에서 발생하는 원인불명의 판독 불가능한 이변들……. 그 외에도 『2012년 지구멸망』에서 제시된 바 있듯이 “2002년 지구를 향해 접근하는 거대 천체를 탐사하는 러시아의 극비 프로젝트 ‘NORLOK’에 의해 촬영됐다는 ‘미지의 행성X’와 “지구멸망에 대비해 엄선된 인간만을 타 행성으로 이주한다는 계획을 가진 미국의 ’프로젝트 노아’에 관한 이야기”들은 비극 이후의 지구를 황홀하게 떠올린다. 인간은 인간의 부재가 곧 지구의 종말일 것이라 상상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인간의 오만이다. 인간의 부재는 단지 인간의 부재일 따름이다. “인류멸망 그 후-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진다면?”으로 알려진 이란 다큐영화를 보면, 하루 한 달 1년, 5년, 10년, 100년, 500년, 10,000년 후의 지구가 어떻게 생존하는지 놀랍도록 생생하게 복원해 낸다. 자연이 자연을 복원해 냄으로써 지구는 인간이 없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서서히 그러나 힘차게 가꿔낸다. 모든 생명이 부활하듯 살아 올라서 빛이 만발하다. 그 삶이 경이롭고 눈부시다. 영화는 말없이 웅변한다. 인간의 비극은 오직 인간에서 시작되고 끝이 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비극적 파국의 확산이 지금 여기 지구 전체에서 도래할 수도 있음을.


 


조태광의 회화는 ‘그날 이후’로부터 시작된다. 그날 이후란 비극적 파국이 종료된 날 이후를 뜻한다. 이때 비극적 파국은 물의 대재앙이다. 노아의 대홍수를 기억하듯이 그의 회화는 물의 재앙이후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그의 회화는 물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그의 회화는 물의 상징으로부터 의미를 획득한다. 첫 번째 의미는 종교성이다. 구약에서 대홍수는 신의 심판을 상징한다. 신은 인류의 타락을 물로서 심판했다. 노아는 신의 계시로 120년에 걸쳐 길이 138m, 너비 23m, 높이 13.8m의 방주를 만들었다. 노아의 가족 8명과 한 쌍씩의 동물들이 살아남았으나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전멸했다. 이러한 신의 심판과 노아의 방주는 조태광 회화에서 주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그 날 이후> 연작 두 점은 물에 잠겼던 세계의 풍경을 단조롭게, 관념적으로 그러나 새싹의 표정을 가진 나무들로 화려하게 그리고 있다. 대지에 박힌 나무기둥 위에 구름과 비둘기를 앉혀 놓은 것은 ‘언약의 징표’를 구현하기 위함일 터.


 


두 번째 물의 의미는 심판에 대한 현존성이다. 그것이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든 자연재해든 끝없는 인류의 욕망에 대한 심판의 현존성. 그런데 그의 회화 전체를 살피면 그 현존성의 실태가 신이 아닌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개의 풀장>은 물의 징조를 은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풀장은 호수나 바다가 아니라 인공구조물이다. 이 구조물 위에 붙잡혀 있는 구름은 물을 뿌릴 것이고 풀장은 넘쳐서 세상을 온통 물로 뒤덮을 것이다. <소리 없이 들리는>에서 대홍수로 물을 쏟아 내리고 있는 호수는 자연이지만 예언의 실현을 위한 예비된 호수일 가능성이 높다. 거대한 물의 심판이 시작되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물이 물이 아니라 예언의 실현임을 깨닫는다. 이때 물은 재앙인 것이다.


 


예언의 실현, 그는 왜 구약의 예언을 회화로 실현하고 있는가.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물의 심판이 왜 그의 회화의 주제가 되었는가. 많은 작품들이 물과 관련이 있으나 <말할 수 없는 비밀>처럼 원자로의 공포를 다루고 있는 작품도 있다. 올해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자로 폭발의 공포를 떠올린다. 그런데 대지진에 의한 쓰나미와 원자로 폭발도 물과 관련이 깊다. 원자로는 대부분 물의 유역에서 물을 다량으로 소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도 물의 재앙을 은유화 한 것으로 읽힌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캔버스를 이어서 제작했다. 두 개의 화면에 두 개의 원자로 속을 그렸다. 둥근 원통 모양의 붉은 원자로가 위험을 내재하고 있어서 위험의 촉발이 언제든 가능한 재앙의 시한폭탄이라면, 그 위에는 위험의 크기를 가중시키는 물의 공간들로 그려지고 있다. 원자로의 폭발은 <소리 없이 들리는>과 유사한 물의 호수를 들어 올려서 거대한 물의 쓰나미를 일으킬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모든 작품들은 물의 재앙 즉 심판과 관련이 깊다. 우연일 터이지만, 2011년 6월부터 8월까지 한국의 여름은 유래 없는 물 재앙으로 몸살을 앓았다. 한강이 범람하지는 않았으나 그 수준에 육박함으로써 도시는 거의 마비가 되었고, 많은 도시가 침수되고 토산이 무너져 내렸으며 계곡이 터졌다. 이름난 계곡의 풍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허다했다. 사람들은 물에 쓸렸고 쓰나미에 덮혔다. 구약의 재앙이 인간의 탐욕에 대한 신의 분노였다면, 현대의 재앙은 인간의 탐욕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재앙이다.


 


조태광의 회화는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탐욕을 문제 삼는 듯이 보인다. 탐욕의 실체 따위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가 그린 풍경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라는 것은 이런 의혹을 진실에 더 가깝도록 생각하게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다시 처음으로>는 왜 그의 풍경이 ‘없는 풍경(비현실/초현실)’을 섬세하게 제시하면서 ‘있는 풍경(현실/지금여기)’을 상상하도록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이해하게 한다. 풍경은 숲이 아닌 나무들의 기립이다. 씨알 같이 생긴, 그래서 모든 나무들의 형상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 나무들. 그 나무들로부터 세계는 새로운 탄생을 자연스럽게 시작하는 듯하다. 대지와 하늘이 하나로 이어진 곳에 열린 우주 홀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여서 무화시키는 홀이 아니다. 그 홀은 고치와 같고 자궁과 같은 우주다. 생명이 열려서 모든 씨알이 툭툭 터져 나가는 시원의 숲이다. 그 숲에서 나무들은 새 세상을 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풍경 속의 초현실적인 홀이 지금 여기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비현실과 초현실의 풍경과 이어진 현실 속의 풍경. 그 현실이 지금 여기의 현실이 될 때, 세상은 새로워 질 수 있을 테니까.


 


<찬란한 영광을 위하여>는 그러나 이 파국적 비극이 끝난 이후의 세상을 보여주는 듯해 우울하다. 아니 이 우울의 실체는 ‘그날 이후’의 세상이 결코 희망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과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녹색의 거대한 비둘기 동상, 그 앞의 흰 물줄기, 내려앉은 비둘기 몇 마리, 옆으로 수조와 뒤로 울타리 지운 나무들. 비평적 상상을 더하면, 세상을 구원한 비둘기는 비둘기의 독재를 성취한 듯 서 있고, 나무들은 울타리 안에서 자란다. 물은 관리되고 비둘기는 더 이상 날지 않는다. 이 화면에서 ‘찬란한 영광’ 따위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무엇이 찬란한가? 비둘기 머리에 박힌 날카로운 압핀처럼 자유나 신세계의 희망은 어지럽고 현기증나는 무엇일지 모른다. 평화는 비둘기의 배 속에서 비만으로 부풀어 오르고 흰 물줄기는 재앙도 심판도 될 수 없는 그저 쇼에 불과할 수도 있다. 세계는 구획되고 조정되며 관리될 뿐이니까. 자유를 관리하고 평화를 관리하고 희망을 관리하는 신세계의 풍경은 과연 찬란한가!


 


- 김종길 (미술평론가)


 


 


 


 


 


작가 약력


 


학력


2011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전문사 졸업


2007 추계예술대학교 미술학부 판화과 졸업


 


단체전


2011 심안의 공식, 175갤러리, 서울


젊음이 있다면, 공간해밀톤, 서울


AC : 교류, 성균갤러리, 서울


2010 The Second Order, 공간해밀톤, 서울


Alternating Current : A-B, 베오그라드예술대학 갤러리, 세르비아


전시의 행방, 미술이론과 갤러리, 서울


The Print & PowerStation, 아트 팩토리, 파주 헤이리


City Song, 스페이스 15번지, 서울


Rare Flash, 한전아트센터, 서울


2008 Everyday is not the Same, Biz-Art Center, 상하이, 중국


2007 드로잉 open-end, 한국예술종합학교 신축교사 갤러리, 서울


 


수상


2010 2011 OCI YOUNG CREATIVES, OCI미술관


한국현대판화공모전 우수상


2007 한국현대판화공모전 특선


 


레지던시


2012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이메일


2000p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