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관
작가이름
장승근전시명
《피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한 건조하고도 명백한 사랑》기간
2026. 08. 20 - 10. 08장소
OCI미술관동굴 안에 있기로 해
장승근은 자기만의 동굴 안에 있다. 세계는 닫혀 있고, 회화는 동굴 안을 채운다. 텁텁한 색, 둔중한 선, 중첩된 붓질. 투박하게 덧대면서 쌓아 올려진 그림들. 그 자신과 그의 연장에 다름 아닌 어떤 관계와 도구들로 채워진 그림들. 지웠다가 다시 그리기를 지속하는 반복의 그림들. 전시는 이 답답하도록 아늑한 그림의 세계를 보여주는 데 충실하다.
만약 여기서 불안과 긴장 같은 것이 읽힌다면, 그것은 이 폐쇄의 논리가 자기도 모르게 의식하고 있는 ‘바깥’, 그 불/가능성이 환기되고 있기 때문일 테다. 한편, 이것이 역시 불안의 수준에 머무는 이유는 동굴 바깥이 도무지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굴의 세계는 벗어나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오랫동안 ‘동굴’의 은유에 부정적 감정을 품어 왔다. 플라톤의 저주 같은 것이라고 해두자. 어리석은 사람들이 동굴 밖 실제가 투사된 그림자를 실제인 것으로 착각한 채 그것만을 보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동굴 밖 빛에 이끌렸고, 드디어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동굴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림자가 전부가 아니라고, 바깥을 보라고’ 웅변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다. 바깥을 돌아보기는커녕, 다시 안으로 파고들었다. 동굴 내부엔, 그림자인 ‘이미지들’이 이미 각자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기에 바깥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그것만을 논했다.
동굴 바깥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에도 거기 남아서 그림자를 보기로 한다면, 동굴 속 사람들은 여전히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을까?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은 이미지에 대한 플라톤 식 저주를 풀어헤치며 말을 붙인다. 실버만은 사람들이 누구나 자신만의 감각으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감각하는 내가
있어 세계가 나타나고, 세계의 나타남은 나의 감각, 내가
보는 이미지에 의해 존재하며, 나는 세계의 존재에 반응하며 감각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본, 자기를 부르는 이미지들로 만들어진 세상에 산다. 왜 아니겠는가? ‘본다’는
것은 인간 보편의 일이다. 그리고 이 보기가 저마다의 폐쇄된 동굴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각각의 ‘개별성(singularity)’을 말한다. 그리하여 동굴의 우화는 ‘보기의 복수성(plurality)’의 은유가 된다.
여기, 동굴 안에 있기로 한 작가가 있다. 장승근의 작업은 자기폐쇄적 세계를 설정하고 그 밖으로 (다시) 나가기를 주저하는 회화적 여정 중에 있다. 그는 특정한 모티프를
반복하고 또 이미지를 자기복제하는 한편, 회화 매체에 관한 반성과 탐구를 “재귀적”으로 수행한다. 먼저, 이번 전시에서 ‘그리기’는
약 2년 전과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인다. 일찍이 자기
주변의 기물과 사람들을 비교적 빠른 필치, 얇은 선, 평평한
붓질과 엷은 레이어로 그려오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운동을 시도한다. 작가가 “느리고 둔중하다” 표현한
붓질은 겹겹이 쌓여 표면에 지층을 마련하고, 과거에 매끈하고 얇은 마무리가 보여주던 산뜻함 대신 텁텁한
인상을 강화한다. 이는 이어서 지적할, 반복되는 도상들과
그림 내적 구조를 물리적으로 받치며 동굴의 논리를 완결하게 될 것이다.
최근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는 작가의 작업실이다. 2024년, 춘천에서 서울로 터전을 옮기면서 장승근은 집과 작업실을
합쳐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캔버스들이 물리적으로 공간을 채우며 두께를 더해 가고, 곧 그것이 생활 영역까지 침범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작가는, 저것들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쌓여간다는 사실에 적잖은 회한을
느꼈다. 동시에 작가는 작업실이자 집인 그 공간을 잘 벗어나지 않는 일상을 지속하고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 이후 작가는 ‘적재와
정체’로 특징 지어진 그 공간 안에서, 캔버스들로 만들어진
동굴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그 자체 조건임을 인정하게 된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한 건조하고도 명백한 사랑〉, 〈서울〉, 〈나쁜 초여름〉(2025) 등에서 작가는 쌓여가는 캔버스들과, 캔버스 속 이미지, 그리고 작업실 내부와 외부가 함께 조망되고 포개지는 장면을 연출한다. 펼쳐진 이젤, 담배나 붓을 쥔 손, 팔레트와 붓, 널브러진 종이 등 작업실 내부가 한편에 있는가 하면, 같은 그림(혹은 인접한 그림)에 파란 하늘, 점점이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새 떼, 구름 조각, 옆 집 옥상, 옥상 위의 빨랫줄과 같은 야외 공간과, 다른 작품에서 영향 받아 그려진 도상 등이 포함되며 그림 속 시공간은 새로운 구성으로 재배치된다. 이미지와 이미지들이 서로 경계 없이, 외려 경계를 의도적으로 가로지르며 그림 내의 시공간을 확장하고, 결과적으로 닫힌 구조였던 ‘작업실’이라는 장소가 한계 없이 그 자체로 완결된다. 그림 위에 다른 종이나 캔버스가 물리적으로 붙은 경우도 비슷하게 이해해볼 수 있다(〈열린 계〉(2025), 〈그림 뒤에 있는 사람〉(2026)). 상이한 맥락을 상기시키기 위해 레디메이드가 도입되는 것이 아니다. 요소들은 모두 ‘이미지 세계’ 속에서 배열되며, 현실적 수준에서 안팎을 찾고 구분하는 일은 무용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그림에 자기 자신과 연인을 자주 등장시킨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때, 인물은 다른 장르나 형식을 모색하는 이질성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인물이 등장하는 그림들도 앞서 살핀 작업실 그림과 동일한 맥락을 형성하며, 이번 전시 전반을 가로지르는 폐쇄성을 확인시킬 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도상들은 모두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붓을 든 손(〈서울〉(2025))이나 잘린 발(〈말 없는 발〉(2025))처럼 축소될 때에도, 대개 웅크린 자세를 하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상으로 변주될 때에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확장된 자화상’이라 부를 형식이 전시에서 거듭 확인된다. 여기서 자화상은 내적으로 닫힌 구조와 시선을 취하는 그림, 결국 한 사람의 상상계로 귀속되는 그림을 가리킨다.
자화상으로서 회화의 형식은 ‘셀피(selfie)’ 류의 사진 이미지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더욱 선명하다. 셀피는 역시 이미지 생산 주체인 ‘나’를 담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시선이 타자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화상과는 반대로 작동한다. 자화상은 회화의 오랜 전통이 전제한 것과 같이, 외부의 시선을 당기거나 의식하기보다 내부의 논리로 존재한다. 그리는 이는 제3의 시선을 의식하고 렌즈를 굴절시켜 자신을 타자로서 드러내는 ‘셀피’와 달리, 스스로가 상정한 내면의 틀 안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직조한다. 즉, 자화상은 끊임없이 내부로 시선을 돌리는 이미지다. 장승근의 그림은 다양한 모티프를 경유해 결국 ‘자화상’의 형식으로 귀결된다고 말해볼 수도 있다.
가령, 〈피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한 건조하고도
명백한 사랑〉, 〈맞담배〉(2025), 〈벼랑〉(2026)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자. 부동의 자세, 보는 이를 잡아 끌지 않는 표정, 응시가 없는 불투명한 눈, 그림의 세계에 머무는 색 면의 덩어리…. 이 인물은 작가의 연인을
모티프로 한 형상이지만, 어떤 ‘타자’로서 등장하기보다는 작가의 시선으로 직조된 하나의 오브제로 나타날 따름이다. 한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자. 〈태도가 형식이 될 때〉(2026)에서
인물은 붓을 들고 누운 자세의 작가를 보여주는데, 이때 전면에 위치한 거울은 그 구도상 거울 뒤편에
사람이 누워 있기에 작가의 얼굴을 보여줄 수 없게 배치되어 있음에도 얼굴을 드러내 보인다. 이는 원근법에
근거한 그림 이해에서는 비합리적인 결론이지만, 그림 내부의 시선이 결국 그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자화상’의 문법 안에서는 가능한 일이 된다. 이처럼 장승근의 그림은 도상과 구도를 아울러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이미지는
‘나’의 동굴 안을 맴돈다.
위의 두 사례에는 분명한 모순이 자리한다. 우선, 전자에서는 일종의 윤리적 긴장—남성 화가의 여성 대상화 문제 등—이 발생하고, 후자에서는 그림 내부의 구조가 정합하지 않다는 점에서 혼란이 야기된다. 이 같은 모순은 플라톤이 보기에 정확하게 동굴의 우화와 결론을 공유하는 것이다. 개별 동굴의 주인은 각자의 억견(doxa)에 사로잡혀 절대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보아도’ 그림자는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구체화한 방식의 대상으로써 나타날 뿐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다들 저마다의 동굴에서 그릇된 환영에 취해 있으니, 이들을 아우르는 ‘진실’은 결코 합치될 수 없다.
하지만 아렌트(Hannah Arendt)를 다시 읽는 실버만에게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로, 결코 화해되지 않는 ‘보기’들의 “영구적” 차이는 세계 이해가 차이를 통해서만 존재하고/나타난다는 점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그 차이와 틈에서 우리는 각자의 욕망, 항상 충족되지 않는 욕망과 어떤 결여를 상기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모순이 다 해결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놓일 자리가 달라진다고 쓰자.) 이로써 동굴 ‘밖’, 그곳으로 인도하던 ‘빛’의 은유는 눈앞의 이미지가 잃어버렸거나 잊고 있다 여겨지는 근원적 결여로 재조정된다. 플라톤 식의 ‘진리’ 내지는 추상적 관념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이 결여에 비관도 필요 없다. 그것이 자체로 동력이 되어 동굴 안 이미지들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해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다시 처음에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동굴의
세계는 벗어나야만 하는 것일까? 동굴 바깥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에도 거기 남아서 그림자를 보기로
한다면, 동굴 속 사람들은 여전히 어리석은가? ‘아니오’라고 답하기가 여전히 저어된다면, 문제의 각도를 좀 비틀어 볼 수
있다. 빛을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는 각자가, 저마다의 동굴을
지키고 있을 때, 동굴 속 이미지들에는 어떤 일이 생기고 있는지. 거기에
어떤 틈이 생겨나고 있지는 않은지, 몸을 돌려 저 빛의 세계, 바깥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가지는 않더라도, 이미지 안에서 결여와 상실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지, 그렇게 타자에 닿거나 반대로 타자를 끌어들일 계기가 생겨날 수는 없는지 물어볼 수 있다.
한 가지 단서를 붙이자면, 장승근의 그림에서
그것은 ‘활자들’로 확인되는 것 같다. 대개 이 활자들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은 텅 빈 기호다. 작가는
그림 속 작업실 바닥에, 그림 속 캔버스 위에 정직하게 글자를 새겨 놓곤 했다. 글자는 선명하게 읽히지만, 그러한 ‘읽기’가 그림 전반을 좌우하는 의미를 작동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때의 읽기는 시각적 차원의 끌어당김을 마련하는 순간에 불과하다. 〈꽃〉(2025)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그림엔 전체적으로 삼각 구도를
형성하는 구조체—이젤과 테이블 등—이 화면 중앙을 가득 채우고
있어, 전체 구도가 안정적인 가운데 상승하는 운동감을 유도하는데, 그
끝에 캔버스가 놓일 자리에 커다랗게 획을 그어 쓴 ‘꽃’이라는
활자가 등장한다. 이때, 한 개 음절로 이루어진 한 개 단어인
‘꽃’은 여타의 의미 작용에 앞서, 다만 눈으로 ‘읽게’ 만드는
시각적 행위를 활성화한다. 그로 인해 활자는 그림 안쪽으로만 작동하던 힘을 바깥으로, 관객 쪽으로 잠깐 이동시킨다. 이미지가 된 활자는 다른 방향성을
잠시나마 환기하고, 다시 그림이 내적 논리로 황급히 돌아갈 때에도 그 가능성을 남겨놓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동굴 안에 있기로 한다.
동굴은 이미지의 세계다. 환영인 동시에 저마다의 진실을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은 그 폐쇄성을 본성 삼아 다른 만남을 예비한다. 장승근의 회화는 그 자체 ‘세계’로써 작동하고 있는 닫힌 장면들을 실험하면서, 그것이 틈을 마련하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지금은 머물기로 한 그가 어느 순간 다른 세계로 성큼 이동해 나갈지는 모르겠다. 우선, 여기 발들인 이상 우리도 잠시 머물러 보기로 하자.
장승근 Seungkeun Jang
jangkamzza.com | godxp123@naver.com
| @jangkamzza
학력
2026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학원 조형예술학부 석사 수료
2020 중앙대학교 예술학부 서양화 전공 학사 졸업
주요 개인전
2026 피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한 건조하고도 명백한 사랑, OCI미술관, 서울
2025 살에
붙는 그림, 에브리데이몬데이, 서울
2023 론도, 온수공간, 서울
주요 단체전
2026 디–스탠스, 라흰갤러리, 서울
하루가 사라진 봄, Art Gallery OWL, 후쿠오카, 일본
2025 페리지
윈터쇼, 페리지 갤러리, 서울
나눠지고 펼쳐진, Unoccupied Gaps, 서울
길어올려진 이미지, 미로센터, 광주
그런대로 그럭저럭
즐거운 그림들, oaoa, 서울
2024 뒷고기, 갤러리인, 서울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 소현문, 수원
2023 꽃밭에는
꽃들이: Flowers, THEO, 서울
2022 이세카이
오–오라, 유아트스페이스, 서울
서울상경작전, 시민청갤러리, 서울
2020 의문문, 스페이스 캔, 서울
SUB_展, 유아트스페이스, 서울
레지던시
2022–23 춘천 예술촌 레지던시 1, 2기
수상 / 선정
2025 2026 OCI YOUNG CREATIVES, OCI미술관, 서울
2022 BAMA AGE2030 어워드
그랑프리 수상, 부산
작품소장
서울시청 박물관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