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관
작가이름
이은경전시명
《수도꼭지 연대기》기간
2026. 04. 17 - 05. 30장소
OCI미술관수도꼭지 연대기
울음을 터뜨린 얼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억누를수록 차오르고 참을수록 커지다가 결국 터져버린다. 수도꼭지가 열리듯 한번 흐르기 시작한 감정은 멈추지 않는다.
이은경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마주한 불화의 경험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뒤틀리고 과장된 신체로 감정이 분열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거친 필선의 드로잉과 입체 조각, 키네틱 작업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그 흐름을 가시화한다. 자책과 분노, 수치심과 억울함이 뒤엉킨 채 한꺼번에 쏟아진다.
말보다 눈물이 솔직하다. 상처를 드러낸 존재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그 사이에서 느슨하고 조용한 연대가 생겨난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유머와 위트 속에서 뜻밖의 숨구멍을 찾는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도 함께 울어본 이들은 서로를 보듬으며 작고 단단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 백소현(OCI미술관 큐레이터)
‘웃픔’의 공동체
바야흐로 각자도생 자기계발의 시대다. 외모부터 ‘기분’까지 자기관리는 필수다. 그야 지나치게 강하거나 오래 지속되는 감정은 생산 능력의 저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감정은 일에 방해 요소다. 우리 영혼의 깊은 풍요를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기쁨도 상실의 슬픔도 일에는 전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바 일루즈에 의하면 ‘감정 자본주의’라 불리는 우리 시대의 지배 논리에서 감정은 관리해야 하는 능력이자 자본으로 간주된다. 또한 전통적인 통과의례가 그리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는 요즘 이런 감정 조절 능력 자체는 ‘어른(adult)’의 자격 요건으로 인식된다. 예를 들어 공적 장소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프로’ 답지 못한, 미성숙한, 무엇보다 ‘여자’ 같은 행동으로 여겨진다. 눈물은 거의 범죄 수준이다. 사회 초년생 기자이자 울보 ‘주현영’은 이런 행동에 대한 우리 시대의 공통 정서를 몸소 증명하는 예시였다. ‘주현영’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약한, ‘아마추어’ 같은, 갑작스레 터져 나와 중단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참으로 골치 아픈 감정 표현 또는 ‘유출’로 인해 사회생활에서 도태될까 잔뜩 겁을 집어먹은 우리는 때로 심리 상담을 받거나 향정신성 약물 요법에 의존하길 선택한다. 감정 규율을 주체 내면에서부터 강화하는 이런 치유 문화는 감정이란 사적 영역이 개인에서 분리되어 자본으로 흡수되게 돕는 실로 효과적인 통치 수단이다. 이제 우리는 아무 목적 없이 단지 일로 돌아가기 위해서만 ‘빨리’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려 한다. 모든 것이 통제되고 계산돼야 하는 감시 자본주의 시대에서 감정은 마치 인간이 인간이기에 갖는 변수이자 결함처럼 간주된다. 물론 시대 입장에선 그렇다는 이야기다.
알다시피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주체를 거의 죽음으로 이끄는 ‘문제적인’ 슬픔에 대해 이미 경고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너무’ 슬퍼 어떤 말도 행동도 없이 그저 울고 누워 있는 사람을 많이 본다. 이런 사람의 초(超)수동적 무능은 정상 사회 질서 유지에 아무 쓸모 없는 그저 방해 요소기에 병적이다. 다른 한편으론 그의 공적 슬픔 전시는 우리 자신의 상실 경험과 미완수된 애도 작업을 상기하게 만들기 때문에 심지어는 ‘위험’하다. 그의 눈물은 주변 사람에게 상실 대상에 대한 공동 책임을 촉구하며 ‘함께’ 울어주길 요청한다. 그러므로 눈물에는 처음부터 공동체적 속성이 있다. 한 방울의 눈물은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는 모든 눈물들의 역사를 한꺼번에 소환한다. 이와 같이 ‘과한’ 감정은 우리 시대에서 문제로 여겨지나 실은 감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공적 존재로서 세상과 타인에게 접속하며 심지어는 억압적인 체제 ‘바깥’을 사유하게 하는 동력을 얻게 된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어떻게든 굴러가는 세상이란 주머니에 불쑥 튀어나온 ‘송곳’처럼1) 기능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은경은 이번 전시를 통해 자기 자신의 상실과 “불화”2)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뭐라 말로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양가적인 감정의 공적 영역을 개방한다. 말이 되는 논리와 언어를 통해 관객을 설득하는 대신 그는 그림의 육박하는 박력으로 관객 앞에 비유 없이 우는 얼굴 ‘떼’를 들이민다. 건드리면 금방 눈물 ‘터질’ 듯한 울먹이는 얼굴과 울기에는 너무 굳게 다문 화난 얼굴, 너무 울어 눈이 ‘3’자로 퉁퉁 부은 채로 두루마리 휴지 지옥을 마치 놀이공원인 양 ‘풀’로 만족하며 노는 ‘눈물 종족’의 얼굴, 억울하고 화난 마음을 참느라고 바들대며 우는 얼굴과 당황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제가 먼저 터진 눈물을 수습하는 얼굴은 이은경의 그림에서 거의 다종다양한 눈물의 박물지학을 이룬다. 앤 보이어는 ‘통곡을 위한 공공 사원’의 아이디어에 대해 쓰며 누구든 필요하면 와서 우는 공간의 필요를 역설했다. “즉 개별적이면서 공통적인 슬픔이 물리적으로 표현”되고 그래도 ‘되는’ 공간이다.3) 이어 그는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언제 어느 때고 원치 않는 눈물이 흘러 나와 결국 자기 자신이 ‘이동식 공공 눈물 사원’이 되고 말았다고 썼다. 이은경의 그림 또한 인생에서 한번쯤은 상실과 고통에 펑펑 혹은 줄줄 울어 봤을 관객을 일시적인 눈물 공동체의 이름 아래 불러 세우면서 이를테면 ‘초소형 이동식 공공 눈물 사원’의 공적 역할을 수행한다.
한편 이은경의 그림에는 눈물만이 있지 않다. 그의 그림은 솔직하다. 여기에는 관객을 오리무중으로 빠트리는 불투명한 암시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즉흥적인 기세와 기분으로 단숨에 그린 듯한 그의 그림은 마치 터져 나온 눈물처럼 숨길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진한 생의 슬픔과 기쁨을 표현하고 분출한다. 그가 전시 주제로 삼은 ‘눈물’이 그에 있어 “양가성이 폭발하는 지점”이라면 그의 그림 역시 유무와 희비가 교차하고 심지어는 공존하는 삶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모순(paradox)을 다룬다. 이는 오직 유머와 위트의 형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전시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거대 얼굴은 이런 의미에서 전시 주제를 압축한다. 흔히 어린 아이들이 천원 지폐로 하는 장난과 같은 방식으로 접힌 그의 그림은 보는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달리 보이는데 이번 경우 아래에서 위로 올려 보게 설치되어 관객은 본래 우는 얼굴 대신 미묘하게 찌그러져 ‘억텐’4)으로 웃는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울지 마세요”라는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듯 이는 물리적인 왜곡을 통해 작가 자신을 모델로 그린 거대 얼굴의 슬픔을 어떻게든 중단하게 만들려는 ‘웃픈’5) 시도다. 여기에는 “수도꼭지” 같이 우는 작가 자신에 대한 조소가 이미 있다. 그런 한편에는 아무리 너희가 그렇게 ‘보려’ 노력해도 원본의 표정 자체는 절대 바뀌지는 않는다는 고집도 있다. 양자는 서로를 꽉 끌어 안고 있다. 눈물과 웃음의 경계는 마치 렌티큘러 렌즈처럼 서로의 단면에 물려 있어 분리는 불가능하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원래 삶이 그러하다. 폭소가 비명의 다른 버전이라는6) 모순을 이은경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유머는 그러니까 압도적인 수준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삶의 진실에 의해 질식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최소 공기 구멍이다. 바늘 하나 들락날락하는 크기의 구멍에서 겨우 피식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래야만 계속 숨을 쉬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은경은 어떤 슬픔을 그린 그림이라 해도 재미와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매일 일기처럼 규칙적으로 그린다는 드로잉 연작에서도 그렇고 연암 박지원의 표현 ‘호곡장(好哭場)’7)에서 제목을 따온 ‘두루마리 그림(絵巻物)’8) “호곡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진 눈물 전부를 완전 소진에 이를 때까지 그야말로 방탕하게 낭비하고 나서야 마침내 먼저 도착해 있던 친구와의 극적 재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은경 버전의 역전된 ‘지옥도’는 문자 그대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너무’ 심한 눈물의 재현을 통해 관객에게 ‘치유적’ 쾌감을 선사한다. 이는 카타르시스의 본래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물렁하고 굳은 거대 얼굴 둘이 서로에게 다가갔다 멀어지는 동작을 반복하는 자동 기계 장치 “태평양같고 활화산같은”은 물리적인 동력으로 그림끼리 서로 마주 보게 하며 이를 통해 일시적인 ‘연결’의 순간을 연출한다. 여기서도 역시 이은경은 그의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다른 어떤 서브 텍스트 없이 보여지는 그대로의 타인과의 마주침(encounter)을 반복해서 상연한다. 혼자 우는 일은 외롭고 남들 앞에 혼자 우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일은 끔찍하게 부끄럽다. 둘이 되면 물론 상황은 나아지지 않겠지만 최소한 혼자 같지는 않다. 이제 둘이 되고 셋이 되면 눈물은 민망한 폭소로 전환되거나 영화 “미드소마”나 소설 “씨를 뿌리는 사람의 우화”처럼 초공감의 ‘떼’울음으로 폭발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눈물에 우리가 익사하지 않기 위해 선박을 건조해야 하는 정도로 울고 나면 분명 많은 것이 전과 같게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세계는 느끼지 않는 자들에게 속한다”9)고 썼다. ‘너무’ 느끼는 자들에게 세계는 내가 함부로 “돌처럼” 뛰어넘거나 치워 버릴 수가 없는 타인의 “개성과 고통, 기쁨”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느끼지 않는 자에게 이는 자기 개성의 투사를 위한 스크린에 불과하다. 이은경의 그림에 등장하는 ‘너무’ 느끼기에 ‘너무’ 울고 또 ‘너무’ 울었기에 웃게 되는 얼굴들은 딱히 타자 지향의 윤리를 갖췄다기보단 단지 남들보다 조금 예민하게 태어나서 전혀 원치 않는다고 해도 모든 것을 과도하게 느껴야만 하는 그런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 됐건 정상 사회 기준에선 이미 ‘도태’일게 뻔한 우리 ‘눈물 종족’에겐 최소한의 세계조차 주어지지 않으리란 사실만은 명백하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단지 우리만이 주어졌다. 이는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눈물 자국이 고스란히 찍힌 크리넥스와 잔뜩 코가 묻은 두루마리 휴지를 낄낄 웃으며 서로를 향해 던지고 논다 해도 누구 하나 관심조차 없을 테니 말이다. 이은경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웃픈’ 눈물로 지은 유토피아다.
– 이연숙(리타)(문화평론가)
1) 최규석의 만화 “송곳”에 등장하는 표현.
2) 작가 노트에서 인용. 이하 표기 없는 직접 인용은 모두 작가 노트가 출처다.
3) 앤 보이어, 양미래 옮김, “언다잉”, 플레이타임, 2021, 228p.
4) 억지 텐션의 준말. 전혀 그런 상황이나 기분이 아닌데도 억지로 분위기를 이끌어 올리려는 태도나 자세를 의미하는 인터넷 신조어.
5) ‘웃기다'와 '슬프다'의 합성어로 일견 웃긴 상황처럼 보이지만 실은 현실의 슬픈 조건에서 기인하는 현상에 대한 반응인,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웃으면서 우는’ 표정을 가리키는 인터넷 신조어.
6) 김언희의 시집 “호랑말코”에서 등장하는 표현.
7) 호곡장(好哭場)은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표현으로 “열하일기”에서 청나라 요동 벌판을 보며 "맘껏 소리내어 울어도 좋은 곳"이라 썼던 문장에서 유래한다.
8) 주로 ‘두루마리 그림’으로 풀이되는 ‘에마키모노(絵巻物)’는 위키백과에 따르면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그림의 형식으로 가로방향에 긴 일본 화지나 비단을 수평방향에 접속해서 장대한 화면을 만들고, 정경이나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9) 페르난두 페소아, 배수아 옮김, “불안의 서”, 봄날의책, e-book 열람.
이은경
lek5123@snu.ac.kr | @lek5123
학력
2026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석사
2018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학사
개인전
2026 수도꼭지 연대기, OCI미술관, 서울
주요 단체전
2025 dYap2025 (DTC 청년작가 프로젝트), DTC아트센터, 대전
잠들지 않는 이들을 위한 노래_Nocturne,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목포
머리 어깨
무릎 발, 우석갤러리, 서울
2024 미종결사건, 우석갤러리, 서울
이빨을
뽑아 새 땅에 심었다, 관악학생생활관 아트돔, 서울
202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관악학생생활관 아트돔, 서울
2019 서울·경기소재 미술대학 우수졸업작품전, 동덕아트갤러리, 서울
수상 / 선정
2025 2026 OCI
YOUNG CREATIVES 선정, OCI미술관,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