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10–18시
작가이름
김라연전시명
《희망상회》기간
2019. 06. 20 - 07. 13장소
OCI미술관희망 상회
거리의 표정을 살피고 다니던 작가에게 어느 날 간판만 덩그러니 걸려있는 낡은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희 망 상 회
살던 사람은 이미 떠나버린 빈집에, 앞날을 꿈꾸는 말 ‘희망’과 이제는 구식이 되어버린 용어 ‘상회’가 나란히 적혀있다니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한 조합이었다. 닳을 대로 닳아 글씨가 떨어져 나간 간판의 겉면에는 그만큼 무상한 세월이 담겨있었다. 한때는 누군가 일상을 일구던 곳이었을 텐데, 그런 곳이 주변에서 자꾸 사라져갔다. 말릴 새도 없이, 아쉬워할 새도 없이.
그럼에도 삶은 이어졌다. 쓰던 사람은 없어져도 사물은 남아 묵묵히 빛을 받으며 자신의 존재를 수긍하고 있었다. 사람이 떠난 빈 땅에는 식물이 자라나 저마다의 생(生)을 이루었다. 그러니 작가는 그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을 막을 수야 없지만, 이 도시가 바뀌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고 그릴 수는 있으니까 땅 위에 쌓인 건물이 걷어지고, 맨땅이 드러나고, 다시 풀이 땅을 뒤엎는 과정을 보고 상상하며 캔버스에 옮겼다. 헐벗은 사물과 장소가 보내는 시선과 마주하며, 나지막이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하며, 바뀌어가는 도시의 표면을 붓질로 보듬었다. 그렇게 이번 전시는 만들어졌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아직도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변해가는 세상을 향해 성급한 대안과 분노에 찬 악다구니를 쏟아내는 대신 김라연은 차분히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음을 다해 오늘을 기록한다. 그의 희망을 듣기라도 하는지, 저 먼 곳으로 보낸 작가의 시선에 풍경은 다만 나지막한 침묵으로 답을 보낸다.
-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빈 땅에 말 걸기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는 너무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과 너무 낯설어서 지워진 것들 사이에서 결여되었습니다. 도시의 욕망을 더듬으며 누군가는 너무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시 불러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너무 낯설어서 지워진 것들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상실에 대한 우울증적 숭배를 앞세워서 때로는 시대의 우울을 선언하면서 말입니다. 현재의 이미지는 그렇게 다시 한번 더 숭배와 선언 사이에서 결여되었습니다1. 그렇다고 실상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이 그렇게 냉철하지도 회의적이지도 않습니다. 어떠한 정치적 올바름도 우리의 삶을 위로할 수 없듯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찌꺼기는 가장 안락하고 가장 은밀한 앙금으로 가라앉아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사물의 아우라가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선은 모든 사물의 이미지에 남겨진 찌꺼기라는 말을 했지요. 주어진 이름을 배반하고, 통속적인 연상에 반항하며, 집단적 맹목을 거부하는, 시선은 인간의 찌꺼기이다2.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 한 방울이 조금은 그대로 내버려질 수 있도록 행여 벌거벗겨져 있더라도, 그 사고의 여백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스산한 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3. 모래가 많아서 물이 늘 모래 밑으로 스며 내려간다고 해서 불렸던 모래내. 이제 막 들어선 아파트의 시멘트 냄새를 뚫고 다다른 곳은 아직은 다세대 촌으로 남아있는 남가좌동 시장 골목 지하의 작은 전시장이었습니다. 눅눅한 기운이 낯설지 만은 않았으나 조금 일찍 도착한 터라 가까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작가에게 저는 어딘가 이방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공사장 펜스를 화폭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녀의 몸도 야밤의 도시 한복판으로 잠입했습니다. 한쪽에는 공사장 펜스가 (실제 용도는 옆으로 미뤄놓은 채) 그 프레임만 남아 무성한 인공 섬을 다소곳이 감싸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 작가는 두 팔을 쭉 뻗어 도시의 미래를 지지하는 간판들에 써늘한 개입을 시도합니다. PARADOX HOTEL4. SANGDO DOOSAN WE’VE NOTHING5. 문득 간판을 수집하고 있던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작업실의 한구석이 떠오릅니다. 그곳에서 학생이었던 김라연은 무언가를 소중히 담고 있었고 반면에 무언가를 소심하게 탓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학생의 행위를 수집이라고 하고 그 학생의 태도를 저항이라고 한다면 수집과 저항은 과연 함께 할 수 있을까요? 그 사이에 무엇이 잠식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단한 스펙타클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학생이었던 김라연의 수집과 저항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요한 소요6를 비로소 만난 곳은 양재동의 한 아파트 상가의 지하 주차장이었습니다.
화창한 가을의 아직 지하 주차장이 들어서지 않은 비교적 오래된 아파트였던 것 같습니다7. 지상주차장이 꽤 넉넉하게 동과 동 사이에 펼쳐져 격자를 그리고 있었으니까요. 아파트 상가에서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 것은 화물용 대형 엘리베이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동차용 엘리베이터였나 봅니다. 화창한 가을 햇살에 비해 썰렁한 지하의 기운에 숨기운이 싸해졌고 정면 어디선가 넘쳐 흘러내릴 듯 고여있는 물웅덩이가 곧게 서있었습니다. 녹는 땅8. 그린 것과 보여지는 것의 오차를 경험할 때 그 간극에는 일종의 시적 여백이 만들어집니다. 그 여백에서 보는 이는 낯선 시각으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감각적으로 낯선 이미지와 이야기들의 파편들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불일치 되면서 결여됩니다. 마치 공사장 흙더미에 묻혀져 사라져버렸을 이름 모를 식물들의 이름을 조사하고 학명을 부르기 대신에 자신만의 문장으로 이름 부르듯이. 혹은 독일의 한 시골길에 피는 꽃 이름을 조사하고 둥근 덩어리에 새겨 물감을 칠하고 낯선 친구들의 손을 빌어 흰 캔버스에 굴리듯이9. 침전된 도시 경험은 언어의 파편이 만들어내는 여백으로 은폐됩니다. 어쩌면 도시 경험은 은폐될 운명에 처해있는 우리 현재의 이미지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작가는 이름 모으기와 이름 부르지 않기를 동시에 작동시킵니다. 수집(이름 모으기)과 저항(이름 부르지 않기) 사이에 일어나는 고요한 소요란 어쩌면 작가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닌 보는 이에게 출현하는 사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8년 봄 신한갤러리 광화문에서 김라연은 양재동 스페이스 엠의 전시장을 다시 불러옵니다. 어느 미술가가 점점 쌓여가고 있던 쓰레기를 치우고 생활오물과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곳을 전시장으로 개조했고 작가는 그곳에서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다》를 보여줬습니다. 안타깝게도 스페이스 엠이 건물주인의 요구로 더 이상 전시장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작가는 그 공간에서 전시했던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신한갤러리 광화문에 재배치하는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린 빈 땅에 도시 기표를 위한 무덤을 만들어가듯이 도심 한복판에 사라질 운명의 공간을 다시 불러오고. 대지를 절단하는 펜스를 열어 봉긋한 봉우리를 만들고 무한한 지평선을 열어가듯이 생명을 다한 공간들 사이로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명명된(naming) 파라다이스를 접어 희망의 소명(calling)을 다 하듯이 김라연은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떠도는 이미지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19년 봄 흐드러지게 만개했던 배꽃이 거의 떨어져가던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을 지나 김라연의 작업실에서 저는 빈약한 흰 봉우리를 만났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에베레스트 산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알프스 산일 수도 있겠습니다. 잔털이 많은 낙타 등처럼 휜 빈 땅을 뚫고 올라오는 날이 선 봉우리는 밝고 희망찬 내일을 숭배하지도 그렇다고 희망찬 내일을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흰 봉우리는 꽃이 다 떨어진 배나무의 앙상한 가지처럼 벌거벗었습니다. 동시에 흰 봉우리는 불려진 이름과 결별(disconnected)하면서 자신의 소명을 찾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고의 여백을 준비하는 제 마음은 벌거벗은 흰 봉우리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김라연의 빈 땅은 벌거벗은 이미지들과 언어들을 위한 공간인 모양입니다. 그 빈 땅에 출현하는 이미지와 언어는 그렇게 냉철하지도 회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가장 안락하고 가장 은밀하게 가라앉은 앙금을 위한 작은 우주를 만들어냅니다. 그 작은 우주는 빈 땅에 말 걸기로 시작됩니다.
1알랭 바디우, 「현재의 이미지」, 『오늘의 포르노그래피』, 강현주 옮김, 북노마드
2발터 밴야민, 「안경점」, 『일방통행로』, p.120-121, 조형준 옮김, 새물결
3도시전치 City Displacement》, 갤러리 라온, 2015년 10월 1일 – 9일
4김라연, 〈Paradox Hotel〉, 디지털 C 프린트, 2013
5김라연, 〈We’ve Nothing〉, 디지털 C 프린트, 2014
6김라연의 작가 노트 2,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시》, 2018 신한 영아티스트 페스타
7《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다》, 스페이스 엠, 2017년 11월 8일-29일
8김라연, 〈녹는 땅〉, 캔버스에 유채, 162.2×130.3 cm, 2017
9김라연,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묻다〉, 2 채널 비디오, 9분 19초, 2015
- 배은아(큐레이터)
작가 약력
학력
이화여대 서양화과 박사 과정
이화여대 서양화과 석사
이화여대 서양화과 학사
개인전
2021 《기억의 포물선》평화문화진지, 서울
2020 《Rolling the Flora_Dongjak》 지구샵, 서울
2019 《희망상회》 OCI 미술관, 서울
2018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시》 신한 갤러리 광화문, 서울
2017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다》 스페이스 엠, 서울
2015 《도시전치》 갤러리 라온, 서울
단체전
2021 《미술원, 우리와 우리 사이》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청주
2021 《지금은 과거가 될 수 있을까》 상업화랑, 서울
2019 《조금, 편한 사이》 김포아트빌리지 아트센터, 김포
2019 《Perspectivism》 이화아트센터, 서울
2018 《사물의 알리바이》, 동덕아트갤러리, 서울
《Axis 2018》, 021갤러리, 대구
2017 《Was sich abzeichnet》, Forum Alte Post, Pirmasens, 독일
《What’s Unfolding》, Arp Museum Bahnhof Rolandseck, Rolandseck, 독일
《出口戰略 (출구전략, Exit strategy)》, 스페이스 엠, 서울
2016 《Outskirts: 경계의 외부자들》, 스페이스 빔, 인천
《Made in Balmoral》, Made in Balmoral, Bad Ems, 독일
《2016 고양 레지던시 입주 작가 소개전 INTRO》, 고양 레지던시, 고양
2015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5》, 아트선재센터, 서울; 동송세월,
철원군 DMZ 접경지역, 강원도
《Homeless》, 홍익대 문헌관 현대미술관, 서울
2014 《new generation 2 텍스트 풍경》, Atelier 35, 수원
2013 《동방의 요괴들 트라이앵글 아트 페스티벌》,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홍익대 홍문관 현대미술관, 서울
2011 《Frozen Music》, 스페이스 15번지, 서울
서성이다, 이화아트센터, 서울
2008 《drawing books of 20 young artists》, 미술 공간 현, 서울
수상/선정
2019 OCI Young Creatives 선정
2018 신한갤러리 광화문 개인전 지원
2017 서울문화재단 최초 예술 지원금 선정
2016 Künstlerhaus Schloß Balmoral, 고양레지던시 국제교환 입주프로그램,
바트엠스, 독일
MMCA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12기 입주 작가
2015 융복합 예술 창작기획사업 생태예술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주관,
국립 생태원과 협력, 갤러리 팩토리 기획
레지던시
2016 Künstlerhaus Schloß Balmoral, 고양 레지던시 국제 교환 입주 프로그램, 바트 엠스, 독일
2016 MMCA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창작스튜디오, 고양